2015년 9월 10일 목요일

회사를 좀 먹는 사내 정치

1998년에 제작된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한 명의 공수부대원을 구하기 위해 여섯 명의 특공대원이 죽는 영화. 그리고 2001년에 그 '라이언 일병'이 속했던 공수부대의 활약상을 그린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제작됐다. 라이언 일병은 안 나옴

끈끈한 전우애와 실감나는 전투신도 인상 깊었지만 무엇보다 중대장 윈터스 대위의 탁월한 통솔력에 감탄하면서 봤음. (저 때 저 곳에 없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가운데 인물이 믿음직한 윈터스 대위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7화 '한계점' 편. 대대장으로 진급한 윈터스 대위를 이은 신임 중대장이 전투 중 지휘를 거의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자, 보다 못한 윈터스 대위가 직접 전선에 뛰어드는데, 이 때 지켜보던 연대장이 외친다.

개념 충만한 싱크 소령

사실 대대 지휘의 소임을 순간 잊고, 중대 전투를 지휘하려한 윈터스 대위의 행동은 리더의 성향에 따라 찬사를 받을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조직을 운영하려는 연대장의 눈에는 지휘체계에 혼선을 주고, 조직의 전체 운영을 방해하는 행동으로 보였던 것이다. 정말 리더의 역할은 어려운 듯.

군대하면 떠오르는 단어

바로 상명하복. 지휘체계가 무너지는 순간 군대는 신속한 결정과 실행이라는 기능을 상실한다. 그래서 군대는 하급자가 상급자의 정당한 지시에 불복함으로써 지휘체계를 무너뜨리는 하극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전까지 군 지휘체계의 혼란은 주로 명령을 받는 계급의 하극상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저 장면을 보면서 깨닫게 되었다. 명령권자의 잘못된 판단이나 명령은 지휘체계를 더 쉽게, 더 효과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음을.

며칠 전 '잘나갔던 최연소 임원 비극 부른 사내 따돌림'이란 기사를 접했다. 무려 3년 만에 고인의 '업무상 재해'를 회사가 아닌 법원이 인정해줬다고. 사내 정치, 사내 왕따의 피해자를 한 번 더 죽이는구나 하면서 기사를 보던 중 시선이 꽂히는 문구가 있었다.
새 본부장은 이씨를 배제한 채 부하 팀장들에게 직접 업무 지시를 하기도 했다

고인이 된 이씨를 업무에서 배제함으로써 조직에서 고립시켰다는 것. 직장인이라면 자신의 업무, 할 일이 없어진다는 의미를 잘 알 것이다.

업무 배제가 33.5%

사회적 동물 운운할 필요도 없이

인간은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순간 죽음을 생각하며, 외눈박이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면 한쪽 눈을 도려내서라도 그들과 동질감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느끼는 소속감에 안도하는 나약한 존재.
인간은 사회적 존재, 가장 치명적인 공포는 사회로부터 영원히 고립된다는 공포 - 싸우는 심리학 (196 페이지)

기사대로면 그 본부장은 자신 또는 자신이 충성을 다하는 상관의 계파로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이용, 고인에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공포로 퇴사 압력을 가했다. 자신이 속한 조직의 지휘체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면서.

대한민국이 6.25 이후 군을 중심으로 경제 발전을 시도하게 된 데는 당시 통일된 지휘체계를 기반으로 더 많은 일을 더 빨리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조직, 한마디로 군대만큼 유능한 조직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 전반을 경직되고 획일화된 군사 문화로 물들이는 병폐를 불러왔음에도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민간 분야로 더 많은 인재가 모였고 더 큰 역량이 쌓였다. 그런데 조직 문화는 이제는 빛이 바래버린 군사 문화에서 발전은 커녕 오히려 더 퇴보해버린 듯 하다.

당연하게 상명하복을 요구하면서도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조직의 지휘체계를 무시해버리는 형국이랄까. 나는 '바담풍'해도 너넨 '바람풍'하라는 것 아닌가.

3명만 모여도 이해관계가 부딪히고, 결국 정치를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지만, 대개는 자신과 친한 또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으로만 판을 짜서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십상인 게 사내 정치.

그리고 그런 사내 정치를 방관하거나 되려 부추기는 조직은 본연의 목적보다 계파의 목적에 매몰된 조직원들로 인해 시나브로 부지런하고, 유능하며, 충성스러운 비효율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제 몸 편하자고 심지어 사람까지 죽게 만드는 사내 정치를 관리하지 못하는, 그런 조직 문화를 가진 회사의 경영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돈만 잘 벌면 상관 없는 걸까? 충성 경쟁을 내려다보면서 흐뭇해하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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