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2일 수요일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문체부 전 서기관이 10년 공직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 에세이.

전도유망한 30대 서기관이 공직을 그만두고 책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비효율', '헛짓거리', '쓸데없는 일' 세 단어로 고백한다.
공직사회의 일이란 그저 관습에 따르거나 기관장을 빛내기 위한 거대한 비효율의 반복 (83페이지)
진짜 필요한 일이 아닌 헛짓거리에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으며 느끼는 공무원들의 자괴감 (188페이지)
공직사회는 일을 못한다. 관료가 게을러서도, 철밥통이어서도 아니다. 그저 쓸데없는 일이 너무 많아서다 (274페이지)

누가 그랬다. 노동 없는 삶은 부패하지만 영혼 없는 노동은 삶을 질식시킨다고. 

짧디 짧은 1년 반의 공직 시절이 떠올랐다 

모 부처 소속기관에서 4년 반을 일했다. 3년은 민간인으로, 1년 반은 공무원으로. 보안장비 룰 정확도 개선을 목표로 3년을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공무원은 과거 어떤 사업자도 언급하지 않던 업무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업무를 시도하는 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만 두고 책을 썼다. 이후 해당 기관의 5급 계약직 채용 공고를 보게 됐을 때 살짝 설렜다. 민간인 신분으로 일할 당시 접했던 실무 최고 책임자가 사무관이었기 때문에 채용되면 소신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물론 현실은 달랐다. 잠시 룰 정확도에 관심을 주던 기관장은 이내 성과 어필에 더 유리한 빅데이터로 관심을 돌렸다. 솔직히 입장 바뀌면 나라도 그랬지 싶다. 당시 그만큼 핫한 아이템은 없었으니까.
보안 수준 향상이 최우선 과제였던 빅데이터
4년 간의 빅데이터 운영 결과

그래도 첫 1년 정도는 나름 보람있었다. 룰 정확도 개선 업무를 사무관 권한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고, 기존 대비 분석 업무 범위 50% 확대라는 결과를 얻었기 때문. 아쉬운 점은 해당 업무가 메인이 아니었다는 것. 메인으로 진행했으면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

진짜 메인은?

원금 보장도 쉽지 않은 보험 시장은 사고, 질병 등의 공포를 먹고 성장한다. 보안 시장도 비슷. 그래서 업계와 공생 관계인 보안 업계지는 끊임없이 보안 위협 기사를 쏟아낸다. 기관장은 그런 업계지를 탐독했고,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내게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물론 그런 기사들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정보보호체계를 큰 틀의 방향성 없이 그때그때 외부 정보에 휘둘리게 만드는, 공만 쫓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동네 축구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이벤트성 업무일 뿐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기관장의 성취감이 충족됐다는 것. 숱하게 실시되는 비상근무와 훈련 역시 기관장과 본부가 원하는, 불철주야 경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는 그림을 보여주기 위함이 최우선이었다.

왜 룰 개선보다 상사 심기보좌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까? 민간의 전문성을 활용하겠다며 뽑아놓고 왜 자신들이 인정한 전문가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일까? 회의감이 점점 커지는 와중에 세 번째 서기관을 모시게 됐다.

정보보호부서는 24시간 보안 이벤트에 대응해야 하는 업무적 특징으로 인해 기피 부서로 악명이 높다. 한마디로 티는 안 나고 몸만 축나는 업무가 많다. 1년 반 동안 세 명의 서기관을 모시게 된 이유.

그런데 세 번째 서기관은 이전 상사들과 좀 달랐다. 모든 업무를 '새마을 운동'하듯 더 많이, 더 오래, 더 열심히 하려는 노력파였고, 그렇게 하면 다 통한다고 생각했다.

시작은 새해 업무 보고였다. 불필요한 업무를 줄이려는 나는 업무 가짓수를 하나라도 더 늘리려는 서기관과 충돌했고, 이후 그의 눈엣가시가 됐다. 처음엔 나를 업무에서 배제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기관장이 나를 계속 호출하는 바람에 실패. 

이후엔 타팀 소관 업무를 지시하려 했다. 일을 뺏지 못하면 부서 업무분장을 바꿔서라도 일에 파묻히게 해주겠다 결심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이어진 전직원 주말 출근 지시. 나 하나 잡겠다는 의도가 뻔한 상황에서, 나 때문에 피해보는 직원들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사직서를 냈고, 1년 반의 공직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런 공직사회 속에서 10년 동안 공무원(公務員)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한 저자의 고뇌가 얼마나 컸을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저자의 바람대로 공직사회에 대한 혁신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가짜 노동

내가 경험한 공직사회는 상사의 업적을 위해 5급 이하 전 공무원이 헌신하는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모두가 리더만을 바라보는 세상에서 리더의 올바른 목표 설정은 필수. 그릇된 목표를 위해 실행되는 어떤 업무도 그릇되고 쓸데없는 일, 가짜 노동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

돈을 벌어야 하는 민간은 돈 안 되는 쓸데없는 일, 가짜 노동을 스스로 쳐내는 경향이 있다. 세금을 써야 하는 공공은 쓴만큼 티를 내야 해서 효율보다 명분과 홍보에 매달리기 쉽다. 비효율에 대한 자정 작용이 힘든 이유. 이런 상황에서 전문성까지 없다면?

기관장이 빅데이터를 선택한 이유는 실/국장, 장차관에게 관련 전문성이 없어서, '유명한 미국 기술'이라는 명분만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아서였고, 노력파 서기관이 업무 가짓수를 하나라도 더 늘리려던 이유는 분야 특성을 모르는 채, 과거 업무 방식을 답습해서였다.  
1980년대에 미군은 군사계획 절차를 수정하고 (바람직한 최종 상태를 의미하는) '지휘관의 의도 '라는 신개념을 도입했다... 지휘관의 의도는 직속 상사로부터 상세한 지시가 없다 하더라도 모든 계급의 병사들이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해준다.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다면 어떤 수단을 취하든 거기 닿기만 하면 될 일 - 스틱

결국 리더의 의도가 올바를 때 의미 있는 업무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조직 구성원이 진짜 쓸모 있음의 가치를 발견할 때 가짜 노동은 사라진다. 올바른 의도를 가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전문성. 알아야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지. 그래서 저자의 제안은 매우 적절하다.
일반직 공무원도 원하는 경우 한 분야에서 장기간 계속 근무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 (240페이지)

한 분야에 머무르며 전문성을 갖춘 관료가 늘어나고, 이들이 올바른 의도를 가진 리더로 성장한다면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 말할 수 있는 공직사회 실현이 현실로 다가오는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하지만 순환보직을 무기로 오늘도 무사히를 추구하는 공직사회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다면 저자의 제안은 환영받기 힘들다. 외부 지적이 아닌, '진짜 일'을 잘해보려고 노력하였는가에 대한 자성의 시간을 갖는 게 먼저라는 얘기.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먼저 문제를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자정 작용의 첫걸음을 알리는 이 책의 의미는 대단히 크다. 10년을 몸 담은 조직에 대한 애정 어린 고언을 결심한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