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8일 목요일

가짜 노동

덴마크 출신 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옌센 공동 저작. 잘 쓰여진 책이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제목의 임팩트만큼은 상당하다. 

거시경제학의 창시자 케인즈는 1930년대에 이런 예언을 했다고 한다. "2030년까지 평균 노동시간은 주 15시간이 될 것 "

산업혁명과 세계대전 이후 기술 발전으로 많은 분야의 노동 효율이 증가했다. 저자는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노동 시간이 줄지 않는 이유로 '가짜 노동'을 지적한다. 가짜 노동?

저자는 의사, 간호사, 교사, 청소부 등 '필수 인력(?)'에 포함되지 않는, 주로 화이트칼라 '사무직'의 노동을 가짜 노동으로 바라본다(..)
가짜 노동하는 사무직의 탄생 (36페이지)
각 생산 과정이 얼마나 걸리는지 관리자가 알 수 있도록 시간을 쟀다... 직원이 하는 일을 감시하는 게 주 업무인 관리직 수가 늘어났다 (43페이지)

산업 사회가 시작되면서 근면의 가치가 높아졌고, 인구 증가와 함께 높아진 교육열이 몸집을 키우려는 조직의 생리와 만나면서 직접적인 노동을 하지 않는 사무직과 함께 가짜 노동이 증가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

노동 효율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실행된 관리 행위가 (면피 목적으로) 남발된 규제 및 관리직의 노동을 증명하는 용도로 전락해 오히려 직접적인 노동을 방해하면서 모두의 노동 시간이 늘고 있다는 것.
업무를 이해하지 못하는 행정 계층이 자기가 아는 정도만 가지고, 그리고 일반적인 감시, 계량의 수단만 가지고 부처를 운영... 센터 관리직은 지역 감독자에게 설명하고, 지역 감독자는 최고 경영진에게 보고하고, 최고 경영진은 정치인에게 답변하며, 정치인은 유권자에게 책임지겠다 말하죠. 그렇게 모두가 면피를 하느라 말단 복지사에게 전부 다 기록하라고 요구해요 (284페이지)
작전계획이 유용하다고 믿는다. '계획을 수립했음 '을  놀지 않고 일했음을 입증하는 증거로서... 하지만 콜디츠 대령은 계획 그 자체에 대해서는 '솔직히 실제 전투 현장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다 '고 말한다. 이에 따라 1980년대에 미군은 군사계획 절차를 수정하고 (바람직한 최종 상태를 의미하는) '지휘관의 의도 '라는 신개념을 도입했다 - 스틱 (50페이지)
  
민간도 까긴 하는데 아무래도 저자, 공무원에게 맺힌 게 좀 있는 모양(..) 그런데 세상에 부조리 없는 분야가 어디 있을까. 모든 조직, 체계, 시스템은 시대의 요구사항이 반영된 결과물이고, 끊임 없이 바뀌는 요구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순기능과 역기능의 공존이 발생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인정 투쟁을 벌이는 인간이 현대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직업을 갖는 것. 진짜 노동이든 가짜 노동이든 인간은 일을 함으로써 정체성을 갖는다. 80억 인류가 인정 투쟁을 벌이는 환경에서 모두 진짜 노동만 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 않을까?

그래도 자정 작용은 필요

부정적인 노동만을 강조하면서 억지스런 느낌이 들 정도로 힘들게 끌고 온 끝에 내린 결론이 너무 꽃밭이라 허탈함에도, 직장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거부감을 느꼈을 법한, 하지만 결국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받아들였을 법한 노동 이면에 대한 고찰은 적절하다.
  • 직업에서 중요한 것 (255페이지)
       - 무언가 결과를 낳는다
       - 흥미롭다
       - 행복하게 해준다
       - 쓸모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 다른 사람을 돕게 해준다
       - 잠재력을 개발해준다

인간은 대부분 나의 쓸모 있음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물론 가짜 노동에도 얼마든지 의미 부여를 통해 쓸모를 찾을 수 있겠지만, 남을 속일 순 있어도 나를 속이긴 어렵다. 진짜 노동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이유. 

나의 진짜 쓸모 있음에 대한 고찰이 이어진다면 최소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은 많이 줄지 않을까 싶다. 결정적으로 내 의지로 내 쓸모를 찾게 해주는 진짜 노동을 한다면 노동 시간이 대수인가. 물론 그래도 여가 시간은 많은 게 좋겠지.

인류의 노동시간은 산업혁명 시절 하루 10시간 이상, 주 6일에서 주 5일 40시간으로 꾸준히 감소해왔다. 최근 논의를 보면 최소 10년 내에는 주 4일제도 정착할 듯. 나의 진짜 쓸모를 찾는 게 먼저라는 얘기.

노동시간 단축사

로마는 노예 노동을 바탕으로 연 최대 200일의 휴일을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망했지 AI 노동을 바탕으로 200일의 휴일을 즐기게 될 미래를 기대해보자. 기억에 남는 문구를 남긴다.
상사가 나에게 할 일을 줄 때, 시간 낭비라는 걸 알지만 상사의 아이디어니까 실패해도 내 책임은 아니다, 그러는 동안 나에게도 바쁘게 할 일이 생겼고 상사는 만족한다는 식인 거죠. 결국 모두가 이득 (109페이지)
실제로는 예산, IT, 분쟁 해결, 사무실 할당, 보고 등 그저 관리 업무일 뿐이에요. 리더십은 순전히 경영진이 50% 더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한 정당화 담론 (196페이지) 
다른 사람에게 관계 없는 정보를 나누고, 자신이 얼마나 바빴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회의가 가진 유일한 목적(231페이지) 
생산물의 가치가 아니라 시간만큼 임금을 받는다는 관념은 우리 안에 깊숙이 박혀 있다. 그 결과 일이 실제보다 오래 걸린다고 말해야 유리해지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253페이지)
우리가 일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일을 할 때만 가치 있는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 결국 바쁘지 않다고 인정하는 사람, 더 의미 있는 일을 요구하는 사람, 즉 금기를 깨는 사람은 주변에 위협이 된다 (306페이지)

댓글 없음:

댓글 쓰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