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5일 월요일

사피엔스

참신한 발상의 전환이 돋보이는 유발 하라리의 인류 역사서.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인지', '농업', '과학' 혁명을 거쳐 만물의 영장이 되었으며, 이제 신 비슷한 존재가 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총균쇠'가 인류 역사를 조목조목 정리해준다면, '사피엔스'는 신선한 해석, 특히 인지 및 농업혁명에 대한 해석이 인상적이다.

인지혁명의 핵심은 상상력

팩트 기반의 말과 글만으로 조직할 수 있는 집단의 자연적 규모는 고작 150명 수준이지만 인간은 상상, 즉 허구를 공유함으로써 그 한계를 무너트렸다고.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60페이지)

저자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포함해서 우리가 신뢰하는 많은 규범이나 원리, 원칙들이 사실은 허구의 산물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우리가 특정한 질서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 (166페이지)

불경스러워서 찰나의 의구심조차 갖기 어려웠던 믿음에 대한 명쾌한 해석. 그런 믿음이 깔려있지 않다면 안 그래도 혼란한 세상, 더 혼란스럽겠지. 그래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 만물에 스며들어 있는 상상의 질서 원리들을 끊임없이 주입받는다.
인, 예, 효를 신봉하지 않았다면, 유교는 2천 년 넘게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역대 대통령과 의원 대다수가 인권을 신봉하지 않았다면, 미국 민주주의는 250년간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169페이지)

'상상의 공유'란 개념 덕분에 인류 문명의 동작 원리가 명확해졌다. 하지만 이윤은 생산에 재투자될 것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믿음, 미래는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신용'이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성장과 붕괴를 반복하는 자본주의를 보면 완벽하진 않나 보다.

저자는 이제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 버린 세상에서 '누가 이 모든 물건을 구매할 것인가? (490페이지)'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신대륙 발견, 내연기관 발명 수준의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미래는 어두울 것이라고 경고한다.
거품이 터지기 전에 연구실들이 이 기대(자본주의 성장의 불쏘시개가 되어줄 과학 혁명)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우리 미래는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446페이지)

2008년보다 더 큰 위기가 나타날까? 누군가에겐 기회가 되겠지만, 난 무섭다. 그때도 겁나 고생했는데, 4차 산업혁명 화이팅. -_-

역사상 최대의 사기 '농업혁명'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인류 번성의 계기로 '농업혁명'을 꼽는다. 뭐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으니깐.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사건 중 하나다. 일부에서는 그 덕분에 인류가 번영과 진보의 길에 들어섰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파멸을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148페이지)
(농업 혁명에 의한 늘어난 잉여 식량은) 인구 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124페이지)

'총균쇠'와 비슷한 주장. 저자가 밝힌대로 '총균쇠'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농경민은 수렵채집인보다 더 오래 일했으나,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았고, 질병을 더 많이 앓았으며, 더 일찍 죽었다. - 총균쇠 (160페이지)

남 좋은 일만 시키는 농사는 왜 지었을까? '총균쇠'의 저자는 여러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결론지었으나('우연히'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느낌), 유발 하라리는 깜짝 놀랄만한 역발상을 보여준다. 바로 '식물 음모론'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124페이지)

결과론이지만 밀, 벼, 감자 등의 식물이 유전자 복사본을 많이 남기기 위해, 편안히 길러짐으로써 더 많은 유전자를 퍼트리기 위해 인간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교활한 식물놈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의 목적이 결국 후손을 남기는 것이라고 본다면 식물과 인간 종을 모두 번성하게 해준 농업혁명은 서로에게 윈윈 아닐까? 이런 의문에 대한 저자의 답.
농업혁명의 핵심은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하지만 이런 진화적 계산법에 왜 개인이 신경써야 하는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129페이지)

유전자 셔틀로 전락하지 말자는 얘기를 하는 듯. 하긴 공장 사육 덕분에 개체 수가 늘어났다고 소, 닭, 돼지들이 행복하진 않겠지. 어떻게 하면 유전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을까? -_-



압축 성장해버린 인류

수만 년 이상 동물로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는 과학 혁명 이후 단 몇백 년 만에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고, 이제 그 동작 방식에 변화를 주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미래는 어찌 될까?

이런 거?

영화적 상상은 대부분 실현되고 있으니 불가능하지도 않겠지만, 나랑은 별 관계 없을 거야(..) 다 보고 나면 살짝 우울해지는 책이다. 수십억 명이 같은 상상의 공유를 통해 하나가 돼버린 세상에서,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 말고는 별로 할 게 없기 때문.

기억에 남는 문구를 남긴다.
기계는 삶을 더 여유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하지만 내가 좀 더 느긋한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136페이지)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일 뿐이다. (177페이지) 
기독교나 나치즘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46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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