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31일 일요일

싸가지 없는 진보

초간단 정의하면 바뀌는 게 이익일 때 진보, 유지하는 게 이익일 때 보수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익을 얻기보다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싸운다. 처음부터 없었으면 모를까, 있다가 없으면 허전하니까.

그래서 바꾸려는 자와 지켜려는 자의 싸움은 지켜려는 자에게 더 치열할 수 밖에 없다. 기득권을 포기하기란 참 쉽지 않다.

그렇다고 입장 바꿔보니 이해가 간다면서 내 이익 추구를 포기할 수도 없으니 진보와 보수와 싸움은 영원할 듯.

주먹다짐으로 끝나는 당사자들만의 싸움이면 간단할텐데, 구경꾼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싸움이라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런데 강준만 교수는 진보가 그동안 당사자들끼리의 싸움을 해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당사자들끼리의 싸움에서 이겨도 구경꾼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진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경꾼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싸가지있게 싸우라는 것.

일리는 있는 것 같다. 흔들리지 않는 진보와 보수 지지층을 제외한, 흔들리는 나머지 구경꾼의 마음을 얻어야 이길 가능성이 높아질테니. 어떻게 해야 흔들리는 나머지 구경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강교수는 그들의 감정을 배려하라고 얘기하고 있다. 

"보수는 인간에게 , 진보는 사물에 말한다." (87 페이지)

무슨 뜻일까?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쓴소리'는 듣기 싫은 게 사람이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감정이 상할테고 '니 똥 굵다'며 무시하거나,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났냐'며 반격을 시도하게 된다.

그럼에도 '쓴소리'가 계속되면? 주는 것도 없는데 괜히 미워지는 거지. 유시민씨는 셀프 디스를 무릅쓰면서까지 '정서적 반감을 주는 언행은 정치인으로선 결점'이라고 했다.

'쓴소리'는 보통 부모와 자식, 선생과 학생, 상사와 부하직원같은 상하, 갑을관계에서 나온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한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쓴소리'를 하려면 (좀 과장하면) 죽음을 각오하는 용기와 받아드릴 수 밖에 없는 명분, 상황을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나?ㅡㅡ)

한비자가 괜히 역린을 건드리지 말라고 한 게 아니다. 오죽하면 조선은 왕에게 지적질할 수 있는 권한을 법으로 보장하는 사간원까지 만들었을까. 제왕 수업까지 받은 왕들도 '쓴소리'는 듣기 싫어했다는 기록이 수두룩하다.


유권자는 갑이다. 물론 표를 줄 때 뿐이지만, 표를 주는 구경꾼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상하관계나 갑을관계를 연상시키는 훈계와 설교를 하고 싶어도 꾹 참고, 동등한 관계에서 가능한 대화와 설득을 먼저 시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논리의 승리보다 감정적인 공감이 먼저라는 것.

한마디로 (잘났어도) 잘난 척 하지 말고 대중의 상식과 도덕관을 거스르지 않는(최소한 거스르지 않아 보이는), 동방예의지국(?)답게 겸손과 예의를 갖춘 정치를 해야 승산이 있다는 얘기다. (때론 겉 다르고 속 다를 필요도 있다?)

분명 설득력은 있다. 심리학에 '감정 휴리스틱'이라는 개념이 있다. 팩트나 합리적, 이성적 추론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겠지만 결국 인물이나 주장에 느끼는 매력, 호불호(好不好)가 판단과 결정에 더 큰 영향을 끼치며, 정치적 기호까지도 결정하게 된다는 것.
  • 휴리스틱(Heuristic) : 인간의 추론, 의사결정, 문제해결 등의 특징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심리학 개념으로 축적된 경험과 피드백을 통해 문제를 풀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하나 정확한 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안티바이러스 기반 기술로도 많이 사용됨. (자라보고 놀란 경험은 두번째 자라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지만 솥뚜껑 보고 놀랄 가능성 역시 높아진다.)

ttimes.co.kr/index.html?no=2016012511507746184

이성이니 논리니 따져봐야 결국 인간은 감정에 의존해서 판단과 결정을 내린다. 부지불식간에 '그 사람에 대한 내 의견'보다 '그 사람에 대한 내 기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내 기분'은 '내 의견'을 결정하는 것 보다 더 쉽고, 더 단순하며, 더 빠르다. 감정이라는 꼬리가 합리적인 이성의 몸통을 흔들어댈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분명 효율적인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2012년 TV 대선토론에서 이정희 전 통진당 대표의 발언은 감정에 흔들리는 나머지 구경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나는 반대편 결집을 위해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ㅡㅡ)

얼마 전 광주에서 홀대받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보고 흔들리는 나머지 구경꾼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보기에는 좀 불쌍해 보였고, 그럼에도 꽤 의연해 보였는데..

정치는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싫어도 내색 않고, 인정하기 싫은 상대도 인정하(는 척이라도 하)며 타협을 해나가는 게 정치인 것 같다. 나처럼 좋은 티, 싫은 티 팍팍 내고 다니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할 일이다. 강교수의 바람처럼 정치인과 유권자가 서로 수준을 높이라고 요구하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지난 18대 대선 투표율이 75%쯤이었다. 투표를 안한 25%는 흔들릴 여지조차 없는, 아예 정치에 무관심한 계층일 것이다. 이들이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진보, 보수 중 누구에게 더 유리할까?

이들은 왜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일까? 혹시 관심을 줄 여력이 없는 것은 아닐까? 경제학자 베블런은 '가난한 사람은 내일 이후의 일을 생각할 만큼의 여유가 없다'고 했으며, 작년에 서거한 영국의 정치가 토니 벤은 '가난에 허덕일수록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줄어든다'고 했다.



동물적 생명 유지가 아닌, 인간다운 생존이 보장되어야만 '교육받고, 건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국민'이 늘어나고, 관심 둘 여력조차 없어서 투표를 못하는 계층이 줄어들 수 있다.

인간다운 생존, 즉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어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정치가 가능해질 것 같다.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주는 것도 결국 정치라는 것. 정치는 과연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주고 싶어 할까?

기억에 남는 문구 몇가지를 남긴다.

"사람들은 이념에 분노하지 않는다. 도덕에 분노한다. 거대한 것에 분노하지 않는다. 사소한 것에 분노한다." (198 페이지)
"정치가는 자본가의 보디가드다. 정치와 정치가에게  혐오의 화살을 돌림으로써 정치만능주의를 유포하고 경제적 지배계급의 책임을 덮게 한다." (20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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