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3일 일요일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지금 다시 계몽'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비평서.
종합하면, 앞의 17개 장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와 '지금 다시 계몽 '에 대한 최종적 비평에 다름없다. 이 비평의 전반적 평은 굉장이 부정적이다 (803 페이지)

미국과 영국의 역사학자 17인이 저술에 참여했는데 용어, 개념 정리부터 시작하는 모습에서 그들의 깊은 빡침이 느껴진다.
스티븐 핑커에게는 역사와 역사적 방법론에 대한 깊은 이해가 거의 없다. 자신이 언급하는 역사시대와 사람들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는 핑커의 책은 그저 역사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일반화 모음집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400 페이지)

'세상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찬 메시지로 빌 게이츠를 매료시킨 핑커에 대한 주요 비판은 본인 주장에 유리한 데이터만을 취사선택한 후, 백인과 서구문명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역사를 해석한다는 것.
이 책의 집필진이 핑커의 연구에서 정확히 짚어낸 결함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809 페이지)
1. 폭력을 민간과 군에 의한, 통계적으로 기록된 사망자 수로 지나치게 편협하게 정의한 것
2. 자신이 주장하는 근대의 평화로움과 대비하기 위해 과거 특정 시대의 폭력을 과장한 것
3. 지질연대학적 맥락을 철저히 무시한 것
4. 자신의 설명에 그럴싸한 유사과학적 특성을 부여하는 원시 형태의 정량적 데이터를 인용한 것
5. 잇따른 주제에서 충분히 많은 반대증거를 무시하거나 일축하는 경향이 있는 것
6. 많은 주제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중받는 학자들을 다루지 않은 것
7. 예컨대 원주민에 대한 폭력, 식민지 폭력, 교도소내 폭력, 환경에 대한 폭력, 동물에 대한 폭력 등 모순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논지를 복잡하게 만들만한 폭력의 범주들을 모조리 배제한 것
8. 전세계적 행동을 설명하길 열망하는 연구에서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및 여타 지역의 역사보다 서유럽 및 북아메리카를 특별히 취급한 것
9. 제1,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소비에트연방, 마오쩌둥의 중국, 폴 포트의 캄보디아 등 20세기의 참상을 최소화한 것
10. 트라우마를 가져온 사건이 지나간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는 대량폭력의 유산을 인식하지 못한 것
11. 아동 성학대, 전시 성폭력, 국제 인신매매, 사이버폭력과 같이 더 새로운 형태의 폭력, 그리고 새롭게 발견된 과거의 폭력을 묵살한 것
12. 자신의 생각과 글의 기저에 깔린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인정하고 살펴보는 일을 체계적으로 꺼려한 것 

그래서 뭐?

사실 핑커 비판은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학계에 단단히 찍힌 핑커. 하지만
스티븐 핑커 역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를 쓰면서 모호한 주장을 복잡한 데이터로 덮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결론을 내린 후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이터를 찾아 자신의 책에 삽입했을 뿐이다. 그는 실증적인 데이터를 수집하고 엄격하게 계산하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일반 대중과 바보 지식인들은 그의 책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데 - '스킨 인 더 게임' 중

인간은 본능적으로 비관론보다 낙관론에 끌리게 되어 있다. 누가 그랬다. 비관론자는 대체로 옳고 낙관론자는 대체로 그르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낙관론자라고. (어쨌든 낙관주의는 비관주의보다 세상 살기 쉬운 방법)
'주택 거품 '이 표현된 사례는 2001년 뉴스에서 8번 등장했지만 2005년에는 3,447번이나 등장했다... 신용평가사들은 주택 거품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 '신호와 소음' 중
자신감 넘치는 예측가들만 보아왔고 또 거기에 익숙한 대중에게 '불확실성 '을 언급하는 것은 결코 승리를 보장해주는 전략이 아니다 - '신호와 소음' 중 
항우울제의 약효가 긍정적으로 나온 연구는 94퍼센트나 발표된 반면, 긍정적이지 않은 결과를 얻은 연구는 14퍼센트만 발표 - '벌거벗은 통계학' 중

핑커 책의 서두를 보라. '믿거나 말거나 폭력은 긴 세월에 걸쳐 감소해왔고 오늘날 우리는 인류가 존재한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이 얼마나 아름답고 낭만적이며 미래지향적인가. 절대적인 숫자만 보면 사실이기도

아마 저자들도 이런 분위기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향 없는 메아리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 대한 잘못된 시각이 바로 잡히길 바라는 저자들이 애처롭다(..)
스티븐 핑커의 역사서는 성격은 모호함에도 그에 대한 반응에는 역사학자들을 위한 중요한 교훈이 있다. 핑커의 메시지는 대중에게 도달하는 반면 우리의 메시지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 학문적 역사서들은 북아메리카의 대중 역사서들만큼 열렬히 읽히지 않는가?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다음에 톺아봐야 할 문제 (354 페이지)

문제를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접근을 좀 달리했으면 어땠을까? 17:1의 싸움을 걸어 핑커 체급만 키워주지 말고, 자신들의 주장을 대중이 좀 더 좋아할만한 방향으로 적당히 타협해서 책을 쓸 수도 있지 않았을까? 

900여 페이지에 걸쳐 핑커의 시대별, 문화별, 국가별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세상은 복잡하기 짝이 없고, 절대 진리같은 건 없음을 알려주는 이 책은 일단 너무 논문스럽고, 그래서인지 너무 지루하고, 결정적으로 너무 늦었다(..)
 

17인의 저자가 하나같이 사실 증거와 주장을 구구절절 서술하는데, 통일된 공통 양식이나 도식화 등을 이용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된 느낌을 전달했으면 더 큰 반향을 얻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쯤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