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8일 일요일

욱일기에 대한 단상

80년대 낭만 폭발하는 포스터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 관람을 시켜주곤 했었다. (500원씩인가 냈음)

그때 기억에 남는 영화가 인디아나 존스, 에이리언2, 고스트 버스터즈, 베스트 키드 정도.

특히 베스트 키드를 관람했을 때는 한동안 학교에 심각한 후폭풍이 몰아쳤었다.

쉬는 시간, 청소 시간 등 짬만 생기면 애들이 단체로 영화 속 무술 수련 장면을 흉내내느라 교실이 난장판이 됐던 것. 칠판 지우개로 수련하던 친구야 보고 싶다.

영화 내용은 유약한 소년이 귀인을 만나 무림지존도 되고, 미인도 차지한다는, 열 너댓 살 남자애들이 환장할만한 무협 판타지. 여주인공도 예뻤음(..)

이 영화가 미국에서는 꽤 히트해서 시리즈가 계속 나온 걸로 기억한다. 나중에 2편을 비디오로 봤는데 왜 그렇게 유치하던지 ㅡㅡ^

그런데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일제 치하에서 아사코 타령이나 한다고 피천득을 무지 씹었던)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그 영화가 한국에 개봉하기까지의 재미난 뒷얘기를 듣게 됐다.

오리지널 포스터
원래 제목은 '가라데 키드'였다. 반일 정서와 심의를 의식한 수입배급사의 배려로 '베스트 키드'로 바뀌었다고. (포스터의 욱일기 디자인도 손 본 듯)

'마징가Z'가 일본 만화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배신감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충격이었다.

그리고 더 충격은 남자 주인공이 시종일관 머리에 두르고 다니던 띠의 문양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의 디자인이었다는 것.

충격을 먹었던 이유는 영화를 봤을 당시 그 디자인이 꽤 멋지다고 느꼈었기 때문이었다. (그 디자인을 흉내낸답시고 교과서나 공책이 종종 낙서투성이가 되곤 했다)

반일(또는 반공)이 곧 애국인 문화에서 자란 탓이었을까? 일제의 상징인 욱일기 디자인을 좋아했었다는 사실에 나는 (소니 워크맨 가진 친구를 부러워했던 것과는 별개로) 꽤나 죄책감을 느꼈었다.

왠 자아비판이냐고? 며칠 전 소녀시대 티파니 양이 SNS에 욱일기를 올렸다고 시끄럽더니 출연중이던 TV 프로그램에서 하차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개인적으로 티파니 양이 광복절을 모독하기 위해 욱일기를 올렸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조차 정규 교육이 아니라 만화방에서 무협지 얘기하다 알게 됐는데(국어 선생님이 한 동네 사는 바람에 만화방에서 자주 부딛쳤음), 미국에서 나고 자라 일찌감치 연예인 생활을 시작한 티파니 양이 욱일기의 의미나 배경을 과연 제대로 알고나 있었을까?

그저 예뻐보여서 또는 필요해서(무슨 필터 기능이 있다고?) 쓰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뿌리깊은 반일 감정상 문제 소지는 충분했다. 논란이 일자 삭제했고, 사과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프로그램 하차.

케케묵은 유승준부터 시작해서 얼마 전 걸그룹 AOA 설현, 지민 양의 '긴또깡' 논란도 그렇고,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세상이 자꾸 달라진다는 생각이 든다.

당당하게 욱일기를 머리에 두른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가 국내에서 흥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수입했던 회사 사장이, 극장 주인이, 단체 관람을 결정한 학교 관계자가 사과를 하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은 내 기억에 없다. 그저 먹고 살기 바쁜 시절 탓이었을까? 광복절을 피해서 상영했었나?

관동 대지진 때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구분하기 위해 발음이 어려운 일본어을 시켜서 조금만 이상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발음을 어려워하는 일본인도 꽤 많았다고(..)

국방, 교육, 납세, 근로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도 안중근 의사의 얼굴을 모르면 바로 매국노가 되는 세상, 끌어내릴 준비를 한 채 호시탐탐 실수하기만 기다리는 세상에 사는 듯한 불안불안한 기분이다. 물론 나같은 무지렁이야 광복절에 욱일기 매고 거리를 활보해도 또라이 취급으로 끝이겠지만.

티파니 양의 잘못이라면 대중의 관심으로 먹고 사는 주제에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반응을 치밀하게 계산하지 못했다는 것? 역사에 무지했다는 것? 사과를 안일하게 했다는 것? 물어뜯기기 만만한 연예인 신분을 망각했다는 것? 그런데 그 와중에 조용히 묻힌 기사 하나.

뭐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 아닌가 싶다. 그런데 누군가에겐 그 실수가 그저 실수가 아니다. 대한민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유승준은 큰 잘못을 했다. 당장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입에 발린 말을 떠벌리다 하루 아침에 그 믿음을 저버렸다. 입 닫고 조용히 처리했으면 흐지부지 됐을 일을 스스로 키웠다. 그런데 누군가에겐 인생이 뒤바뀌는 잘못이 누군가에겐 대수롭지 않다.


'총균쇠'란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무력 독점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고, 자원 재분배를 잘 해서 대중을 기쁘게 하면 지배자가 평민들보다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

연예인과 권력자에 대한 이중잣대가 가능한 이유는 연예인이 더 만만해서다. 물론 권력자의 지배에 만족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람이란 게 원래 좀 시시한 존재라서?

"사람들은 거대한 것에 분노하지 않는다. 사소한 것에 분노한다." - '싸가지  없는 진보' 중

모르겠다. 안 어울리지만 시나 하나 읊어본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 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째 네번째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제 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비켜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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