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2일 토요일

경쟁의 정의를 다시 쓰는 프로듀스101

어렸을 때 라이덴이라는 오락실 게임을 좋아했었다. (총알이 레이저로 바뀔 때 쾌감 쩔었음) 한 게임에 세 판까지 할 수 있었던가? 항상 시작은 여유로웠지만 마지막 판이 끝날 때면 무척이나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기회를 한 번만 더 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뜬금없는 게임 얘기는 그만 요즘 악마의 편집, 노예 계약서, 괴랄한 순위 선정 등으로 말이 많은 '프로듀스101'이라는 예능을 보고 있다. 아래는 이 프로그램의 존재를 알려준 기사 한 토막.
[슈퍼스타 K 2]에서 다른 직업을 병행하며 노래를 부르던 허각이 우승했을 때, 많은 미디어에서 이것을 ‘공정경쟁’에 대한 대중의 염원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단어를 누구도 말하지 않는 2015년, [프로듀스 101]은 경쟁의 정의를 다시 쓴다. 경쟁은 모두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니다.


'쟤들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가 확고하고, 그 분야에서 성공하려는 열정을 가진, 덤으로 TV에 얼굴을 알릴 기회까지 얻은 행복한 애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고 있는데 지난주 방송분이 좀 인상깊었다.

인기 투표 상위권 연습생 위주로 편성된 댄스팀의 공연이 있었는데, 순위에 연연하지 않고 재미있는 무대를 보여주겠다는 그들의 마음가짐이 참 좋아보이면서도, 가진 자의 여유(?)같은 게 느껴져서 묘했다고나 할까?

상위권 연습생들의 연습 과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쟤들은 즐기고 있구나. 하위권 연습생들의 절박함은 보이지 않는구나.

반면 좋은 무대를 보여주고도 마지막 무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하위권 연습생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 마음을 안타깝게 하더라. 인질극이라는 평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천재도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도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무대를 즐긴 상위권 연습생들의 공연이 더 큰 호응을 얻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그들이 무대를 즐길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부단한 노력끝에 쌓은 실력도 한몫했겠지만 무엇보다 크게 작용한 힘은 인기 투표로 확인된 탄탄한 지지기반에서 얻은, (실수 좀 하더라도) 다음 무대에 또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닐까 싶다. 

든든한 스페어 타이어가 있다는 것

하위권 연습생들은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배수의 진을 쳤을 것이다. 죽고자 하면 산다지만 즐기기엔 좀 무리지 싶다. 즐길 수 있으려면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현실적인 믿음, 비빌 언덕이 필요하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이상 즐기는 경지에 도달하려면 열심히 하는 단계에서 목숨을 걸 만큼의 간절함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결국 노력 부족인가?


이 프로그램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자신을 흙수저라고 소개하는 연습생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 수저계급론이 대한민국에 완전히 정착한 모양이다. 

이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스페어를 가졌기에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다양한 선택지 앞에서 어디서 보물이 나올까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면 금수저, 두 번째 기회는 없을 것 같아 어디를 밟아야 지뢰를 피할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한 발 내딛기가 어렵기만 하다면 흙수저.

스페어의 든든함은 본인의 의지와 합쳐져 다양하고 과감한 도전을 가능케 하고, 실패로부터 배움을 즐기는 자세를 취할 수 있게 해주며, 결과적으로 무한한 시너지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스페어가 없다면? 인생 한 방이지 뭐.

지뢰 밟고 한 방에 훅 간 류승범

그나저나 아이들은 착하더라.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끼리, 한정된 공간에서 먹고 자고, 살 부대끼는 환경에서 전우애(?)를 느끼다가도 결국 함께 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지만 불공정, 불합리한 방송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해 시스템에 적응한다.

물론 불협화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카메라에 편파적으로 비쳐진 모습 외에는 판단할 근거도 없지만 그 정도면 거의 '천사들의 합창' 수준.

그들에게 해줄 말은 별로 없다. 잘난 이는 잘난대로, 못난 이는 못난대로 평생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 선전하고 있다는 얘기 밖에.

그저 이번에 실패를 맛보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분야를, 그리고 잘 하는, 좋아하는 분야를 찾은 행운의 주인공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 일에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16.05.12
친해져야 팬덤을 모을 수 있는 세상이 온 듯.

19.11.10
대국민 사기극... 운도 실력도 조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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