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4일 월요일

꼬리가 몸통을 흔들다

반 아이들에게 나눠주라고 한 선생님의 예상 문제지를 반장이 독점하고 하루에 한 문제씩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부반장이 그 문제지를 훔쳐서 반 아이들에게 나눠줘 버렸다.


자원외교 비리 수사가 고 성완종씨를 거치면서 정치인 비자금 수사로 변질된 지 한참이다. 사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정작 흥미를 끈 건 '성완종 녹취파일'을 둘러싼 일련의 상황들.

지난 4월 9일 성완종씨는 자살 전 직접 경향신문에 전화를 걸어 보도를 전제로 인터뷰를 요청했고, 경향은 녹취파일 공개를 약속했다. 그러나 경향은 약속과 달리 녹취파일을 '쪼개서' 보도하기 시작했고, 15일엔 검찰에 제출했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검찰 제출 전 증거 보전 작업을 자원한 김인성 교수에 의해 녹취파일이 jtbc 당일 뉴스에서 공개된 것. '국민의 알 권리 VS 파렴치한 절도' 사이에서 대대적인 논란이 일어났다.

일단 연예인들의 사생활까지 '알 권리'로 양해되는 세상에서 성완종씨의 녹취파일은 고인이 죽기 전에 국민에게 공개하기를 바란, 국가비리에 관한 정보인만큼 신속하고 정확하게 (국가의 주인인) 국민에게 전달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렇다면 과연 jtbc는 국민의 알 권리를 앞세운 파렴치한 절도범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1. 경향은 녹취파일을 공개하겠다는 최초의 약속을 깼다. '유족의 반대'가 표면적인 이유다. 유족들의 참담함은 이해가 간다. 육성 공개를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를 내세워 공개를 하지 않은 경향은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했다.

고인의 유지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사적인 정보가 아닌 국가 차원의 비리 정보다. 유족의 바람이 국민의 권리보다 우선할 수 있는가? 변명이 될 수 없다.

2. 경향은 1주일 가까이 전문을 공개하지 않았다. 국가 비리 정보다. 내가 비리 연루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정보가 공개되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막거나, 조작하려 들지 않을까?

결국 녹취 전문은 1주일이나 지나서 국민에게 공개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정보가 왜곡됐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왜곡되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다. 경향이 불필요한 의혹을 만든 것. 결과적으로 국민들 마음속에 의심을 키웠고, 결국 분열시켰다.

검찰 제출 다음 날 경향이 전문 보도를 약속했으므로 하루 먼저 국민에게 알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다거나, 국민에게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닌, 특종에 눈이 먼 행위로 jtbc를 비난하는 여론도 많다.

이미 얘기했듯이 경향은 불필요한 의혹을 만들었다. 1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jtbc의 보도는 그런 의혹을 전혀 해소하지 못한다. 그러나 의도했든 안했든 알 권리를 훼손시킨 언론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는 충분하다.

아쉬운 것은 일반 국민들보다 언론의 사명을 잘 아는 언론인들이 경고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 언론개혁시민연대나 많은 언론매체들이 이번 사태를 윤리나 도덕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알 권리가 아닌 '절도'를 강조하고 있다.

공자, 맹자가 강조한 윤리가 결국 지배 이데올로기로 쓰였을 뿐임에도 윤리는 필요하다. 그러나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그 경중을 따질 필요는 있다. '미뇨넷호 판결'은 윤리에도 상황에 따른 해석의 변화가 필요함을 잘 알려준다.

분명 jtbc는 언론 종사자간의 윤리를 저버렸다. 그런데 그 윤리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언론의 윤리보다 더 중요한 것인가? 줄리안 어산지나 에드워드 스노든이 '훔쳐다' 준 정보에 환호하던 언론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악을 보고 분노할 만큼 윤리적이어야 하지만, 악과 싸우는 데 방해가 될 만큼 윤리적이어서는 안 된다

'절도'라는 키워드 때문에 '알 권리'가 별 것 아닌 게 돼버린 희한한 상황이다. 주객이 전도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비정상적인 상황. 자원외교 비리 수사를 관심있게 지켜보던 많은 국민들이 이제 jtbc가 잘했네, 아니네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 지엽적인 논쟁이 촉발되면서 수사의 본질은 흐려질대로 흐려져버렸다.

사족
녹취파일을 jtbc에 건넨 김인성 교수 역시 많은 뭇매를 맞고 있다. 분명 비윤리적인 행위를 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녹취파일의 빠른 공개를 원했다면 차라리 양심선언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그랬다 하더라도 내부고발자를 마뜩치 않게 바라보는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러나 현재 그에 대한 (특히 동종 업계 종사자들의) 비난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고, 인정하기 싫지만 인간의 이성은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누군가에 대한 내 감정'이 '누군가에 대한 내 의견'을 결정한다는 것. (나 역시 감정의 영향을 받아 이 글을 쓰고 있다)

'한국 IT산업의 멸망'부터 네이버 문제 제기 등 그의 행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안다. 그의 언행이 항상 완벽한 것도 아니다. 성인군자도, 전지전능 하지도 않은, 실수하는 인간이기 때문.

그러나 교수라는 기득권을 내던지고 IT 분야의 부조리를 알리려 한 노력은 인정해줘야 한다. 큰 방향이 맞다면 작은 실수를 빌미로 전체를 매도할 게 아니라 실수를 고치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고, 모난 돌이 얻어맞는 법이다. 이것만 명심하면 세상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지혜가 부족한 김인성 교수나, 김부선씨 같은 분들 덕에 우리는 최소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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